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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진실?

만년설/정리맨 2006. 8. 19. 18:29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고구려 평원대왕(平原大王)이 딸이 있었는데 늘 울고 있었다. 임금이 웃는 말로 "네가 울면 내 귀를 어지럽히니 네가 자라서 벼슬하는 자의 아내는 되지 못하고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 보내리라."했다. 온달은 얼굴이 못생기고 집이 가난하여 헤진 옷과 떨어진 짚신을 신고 거리에서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공양하는 사람 이었다.

공주의 나이 16살이 되어 상부대인(上部大人)에게 시집 보내고자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임금되신 분은 실없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를 溫達의 아내라고 늘 이르셨는데 어찌 전에 하신 말씀을 고치리이까. 보통사람도 실없는 말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임금님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노하여 공주를 내쫓았다. 공주는 보배로 만든 팔찌 수십개를 갖고 궁궐을 나와 溫達을 찾아갔다. 溫達은 처음에 여우나 귀신으로 의심하며 두려워 사양 하다가 후에 보잘것 없는 음식을 차려놓고 아내로 맞이 하였다. 공주는 지나온 사정을 얘기하고 溫達과 혼례를 올렸다.

高句麗의 溫達이 공주와 부부가 되니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 밭과 집 그리고 집에서 쓸 기구를 모두 갖추었다. 또 나라에서 쓰던 말이 여위어 버리는 것을 사다가 잘 먹여 부지런히 기르니 말이 살찌고 힘이 붙었다. 溫達의 말타고 활쏘는 재주도 날래고 능숙해졌다.

평원왕이 낙랑(樂浪) 언덕에서 하늘에 제사드릴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할 때에 신하들과 오부(五部) 병사들이 다 따랐다.
그러나 溫達이 자기가 기른 말을 타고 쫓으니 항상 앞섰으며 잡은 짐승이 남보다 많아 겨룰 자가 없었다. 또 요동에서 후주(後周)의 군사를 막을 때 溫達이 선봉이 되어 질풍같이 쳐서 크게 이기니 평원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이 내 사위다." 하고 예로 맞아 대형(大兄)으로 삼고 몹시 사랑했다.

영양왕(嬰陽王) 때에 신라를 치다가 溫達이 싸움에서 죽었는데 장사할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끝났으니, 오! 슬프도다 돌아가시오." 하니 관이 움직여 장사 지냈다.
(神檀民史 金敎獻 중에서 발췌)

이 당시 新羅가 고구려의 한수(漢水)지역을 차지하여 신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온달은 왕에게 청하여 자신이 공을 세우겠다고 청하였다. 왕이 군대를 내어주자, 溫達은 떠나면서, 신라에게 잃어 버린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溫達은 新羅와의 아단성[阿旦城 : 지금의 아차산(阿且山)이라고 현 사학계는 주장함]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韓半島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을 한강(漢江)이라고 표기합니다. 이것은 三國이 한수(漢水)를 놓고 싸운 기록에도 입증되어 있듯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강입니다. 또한, 이 漢水를 놓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의 제국과 高句麗, 百濟, 新羅가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漢"이라는 것은 "크다"라는 뜻의 우리말 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왜 "한(漢)"이라고 표기되었냐는 것에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일부는 "한강(漢江)"을 "한강(韓江)"으로 바꾸어 표기하자고 합니다. 漢나라를 의미하는 "漢"자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漢나라의 영역이 반도의 지금의 漢江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漢의 원래의 뜻은 江을 나타내고 있으며 漢水의 漢 이라는 뜻입니다.

옆의 지도를 보시면 "漢水"가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의 半島의 漢江 보다도 훨씬 큰 강이 아직도 그 이름을 간직하고 대륙을 흐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대륙의 漢水와 長江이 만나는 곳에는 "한양(漢陽)"이라는 도시도 있었습니다.(지금은 武漢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름도 우리의 역사상에서 등장하는 그 이름이며, 바로 그 문제의 "한수(漢水)"입니다. 평강공주의 남편이자 고구려의 장군 溫達은 지금의 반도의 中原과 漢江을 차지하기 위해서 後周, 新羅와 싸운 장군이 아니라 대륙의 漢水와 中原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다 숨진 장군입니다.

 

지금의 반도의 산골이 고구려왕의 사위가 나가 싸우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별 중요한 곳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하게 여기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곳이겠지요.. 우리역사에 등장하는 한수(漢水)를 반도로 가져와서 해석을 하니, 이상하게도 왜 반도에 漢나라를 의미하는 "한수(漢水)" 즉, "한강(漢江)"이 있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보 溫達 만도 못한 바보짓을 지금의 우리가 저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역사에 등장하는 아단성(阿旦城)과 "아차산성(阿且山城)"의 한자가 비슷하다고 하여 阿且山城을 阿旦城이라고 까지 합니다. 하지만, 溫達이 대륙에서 싸운 장군이라는 이러한 사실은 천문학적으로 나타난 과학적인 증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사실입니다.

 

溫達將軍은 대륙의 5胡 16國 시대에서 隋나라에 이르렀던 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 대륙은 나라가 어떻게 생기고 망하는지 기록조차 제대로 없는 혼란의 시기이고, 高句麗는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溫達將軍은 後周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隋나라 武王의 침입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 이었습니다. 고구려 왕의 부마인 溫達將軍이 반도의 좁은 중원(中原)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왜곡하면서, 심지어 향토사학자들은 충북지방의 각종 지명을 溫達과 연관지어 설명하려고 하면서(溫達山城 이라고 부른다고 이곳이 溫達이 쌓았다고 하기도 함), 그 이름까지도 바꾸고 있는 실정입니다. 향토사학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현재 사학의 모순점을 鄕土史學에 기대려고 하는 노력이 우리의 역사를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상선약수 지음

출처 : 넘버원 대한민국
글쓴이 : 용화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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